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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구별 인구

동구 인구수(Incheon) - 2023년

by allinfo's today 2023.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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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동구 개요

인천광역시 동구는 동쪽으로 남구와 부평구, 서쪽으로 중구 영종도, 남쪽으로 연수구, 북쪽으로 서구에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6°35′∼126°39′, 북위 37°27′∼37°29′이며, 면적은 7.19㎢, 인구는 7만 2572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1개 행정동(7개 법정동)이 있고, 구청은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동에 위치해 있다.

 

인천광역시 동구청

인천광역시 동구청

www.icdonggu.go.kr

 

 

 


 

인천시 동구 역사

1914년 4월 1일에는 지금의 중구와 동구 지역만을 인천부로 하고, 인천의 나머지 전역과 도서 지방을 통합해 부천군이라는 행정 구역을 신설하였다. 아울러 인천부의 정리명(町里名)을 개정하고 구역을 확정하였다. 이 때 금곡리, 우각리, 송림리, 송현리는 그대로 두고, 평동과 화촌동을 통합해 화평리로, 만석리를 만석동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수유동 일부를 묘도정(猫島町)으로 독립시켰다.

한편 동구는 일제강점기 경인공업지대의 중심지였다. 1934년 현 동일방직(주)의 전신인 동양방적(주)이 설립되었고, 1937년 현 대우중공업의 전신인 조선기계제작소가 설립되었다. 1940년에는 현 인천제철(주)의 전신인 조선이연금속(주)이 설립되었다.

광복 후인 1949년 5월, 동구는 인천시의 본청 관할 구역 내에 속하였다. 1956년 11월 23일 인천시 조례 제114호로 인천시 출장소 설치 조례가 개정되어 1957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 때 기존의 5개 출장소 외에 본청 관할 구역을 중부, 북부, 동부, 남부 등 4개의 출장소 관할구역으로 분획되었고, 여기에 각각 새로운 출장소가 증설되었다.

현재 동구의 모태가 된 행정구역은 북부출장소(11개동 관할)와 동부출장소(8개동 관할)가 관할했던 지역이다. 1963년 1월 1일 부천군 영종면 운남리 작약도가 인천시 만석동에 편입되었고, 북부출장소와 동부출장소가 병합되어 동구가 설치되었다.

1973년 3월 12일에는 동구 관할의 월미도가 중구로 편입되었다. 1981년 3월 13일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인천직할시 동구가 되었으며, 그 후 1988년 5월 1일 동구는 자치구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 인천이 광역시로 개칭되면서, 동구는 인천광역시 동구로 불리게 되었다.

 

 

 


 

인천시 동구 인구(인구수)

동구의 총 인구는 59,922명이고 세대수는 28,219세대입니다.

행정기관 총인구수 세대수
동구 59,922 28,219

 

인천시 동구 동면읍 인구(인구수)

동구에서 송현1.2동이 인구가 가장 많으며 인구는 9,909명, 세대수는 4,363입니다. 두번째로는 화수2동 인구가 많고 인구 7,187명, 세대수는 3,670입니다. 세번째는 만석동으로 인구는 6,497, 세대수는 3,124입니다.

행정기관 총인구수 세대수
송현1.2동 9,909 4,363
화수2동 7,187 3,670
만석동 6,497 3,124
송림1동 6,259 2,795
송림4동 6,047 2,519
송림6동 5,813 2,490
송림3.5동 5,670 2,534
화수1.화평동 5,625 2,787
송현3동 2,976 1,655
금창동 2,302 1,272
송림2동 1,637 1,010

 

 

인천시 인구수 - 2023년

인천시 개요 동쪽은 경기도 부천시, 서쪽은 황해, 남쪽은 시흥시, 북쪽은 김포시와 접하고 있다. 위치는 동경 124°36'~126°47', 북위 36°55'∼37°58'이다. 면적은 1,062.6㎢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016년

blog.allinfo.today

 

 

 

 

인천시 동구 인구(인구수) 그래프

 

인천시 동구 인구(인구수) 추이

동구 인구는 1970년 17만명 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인구가 처음으로 10만명 이하로 감소했고 이후에 인구가 계속해서 감소했습니다. 2023년 현재 5만 9천명이 동구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인천시 동구 산업 및 교통

동구는 임해공업지역과 이를 지원하기 위한 시가지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지역이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과밀 주거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자연녹지가 전무하다. 현재 31%에 달하는 토지가 공장 용지로 이용되고 있을 만큼 공업 지역의 비중이 크다. 동구는 섬유, 목재, 제철 등의 중공업이 발달되어 있지만 상업 활동에 있어서는 지역 내 대부분의 시장이 1970년대 개설된 재래시장으로, 백화점, 쇼핑센터 등 현대적 유통시설이 부족한 실정이다. 최근 인천교 매립지에 대규모 공구 상가 및 산업유통단지를 유치하는 등 지역 경제의 활성화가 기대되고 있다.

동구의 남쪽 경계에는 경인선 철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공업지역에 인접해 형성되어 있는 도로가 서쪽으로는 월미도 및 인천항 부두, 동쪽으로는 경인고속도로 및 서구 해안 매립지역의 공업지역으로 연결되어 있어 큰 역할을 한다. 주거지와 시가지 구간은 송림동 로터리를 중심으로 간선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나, 그 외에는 구릉지의 지형적 제약 및 주거지 밀집 때문에 도로의 폭이 좁고, 불규칙한 패턴을 보인다.

동구는 협소한 면적에 인천의 대표적 상권인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학교, 시장, 유흥시설이 밀집하고 있어 만화로, 송림로 등 주요 간선도로의 교통량이 매우 많다. 도로는 지형적 여건으로 인해 대부분 격자형이 아닌 굴곡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간선축 역할을 하는 반월로와 만화로 구간이 상대적으로 협소하고 교통난이 심하다.

 

 

 


 

인천시 동구 관광

화도진은 1882년(고종 19) 5월 22일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된 장소로 유명하다. 화도진지는 화수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화도진을 설치하게 된 배경은 1877년(고종 14) ‘일본인들이 전라도 방면을 측량한 후 상경할 것’이라는 동래부사의 보고를 접한 조정에서 대책을 논의하였고,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인천, 부평 연안의 방어를 위해 1878년(고종 15년) 8월 화도진을 설치하게 되었다.

‘진(鎭)’이란 ‘진영(鎭營)’의 준말로, 조선 초부터 지방대의 준영군으로 각 수영과 병영 밑에 두었던 직소를 말하며, 진사(鎭祉)란 진이 있던 터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화도진은 구한말 서해안으로 들어오는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천 연안에 진과포대를 세운 장소인 것이다.

인천시는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화진포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 할 계획을 세워 1차로 3억 원을 들여 500평을 개발하고, 기념 표지석을 세웠다. 이후 1988년 12월 옛 화도진지를 기본으로 6252평에 33억 원을 투입, 화도진 병영을 완전 복원하고, 각종 편의시설 및 부대시설을 갖춰 도심 휴식공간으로 조성하였다. 화도진공원 안에 있는 주요 시설물로는은 동헌, 내사, 사랑채, 전시관 등의 건물이 있다.

한편 만석동에 위치한 작약도는 인천 연안부두 북서쪽 약 5㎞ 지점에 있으며, 면적 3만 7600여 평, 섬 둘레는 1.2㎞이다. 연안부두의 연안여객선터미널이 생기기 전에는 만석부두에 정기노선이 있었고, 현재는 연안부두에서 작약도행 배가 떠난다. 작약도는 숲이 잘 보존되어 있고, 산정에서 주변을 둘러 보면, 작약도 특유의 개방감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1999년 인하대학교에서 발간한 『인천지역 유적·유물 지명표』에 의하면, “만석동 작약도에는 선사시대 조개더미와 함께 그곳에서 석기와 빗살무늬토기 및 돌화촉이 출토되었으나, 소장처는 불분명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작약도는 영종진(永宗鎭)에 땔나무를 공급하였던 수목지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작약도의 원래 이름은 물치섬이다. 작약도는 월미도 북서쪽, 강화와 김포 사이의 염하(鹽河)와 인천 앞바다를 잇는 해수로(海水路) 상에 위치한 섬이기 때문에, 조수간만의 영향으로 ‘바닷물이 섬에 받힌다’는 의미에서 물치섬(勿淄島)이라 불러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작약도는 『청구도(靑邱圖)』, 『대동지지(大東地志)』,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에 ‘물치도(勿淄島)’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1919년 제작된 1:50000지형도(조선총독부)와『인천부사(仁川府史)』에는 ‘작약도’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밖에 동구의 명물로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 있다. 이곳은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의 경계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골목은 경인선 철로가 놓이기 전,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대표적인 통로였던 ‘우각리 길’이었다. 배움에 목말랐던 1960∼70년대 학문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었던 인천의 유일한 헌책방 골목이기도 하였다. 이 골목에는 헌 책을 파는 서점을 비롯, 일반 서점까지 합쳐 약 10여 개의 책방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는 국문학적인 고서 자료로부터 미술, 음악, 한방, 그리고 어린이 전집류, 사전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서적을 찾아볼 수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박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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